미케네인들은 멸망 후에 시작된 그리스 문명은 출발이 그다지 영관스럽지는 못했다. 약 기원전 1000년 무렵에 여러가지 그리스어 방언을 쓰는 사람들이 에게 해 주변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주된 민족은 주로 그리스 본토에서 살았던 도리아인(Dorians)과 많은 섬들 및 소아시아 서해안 지역에서 살았던 이오니아인(Ionians)이였다.
그들은 넓게 흩어진 소규모의 여러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는데, 이들 공동체가 모여 마침내 폴리스로 발전 하였다. 최초의 공동체는 가난하고 미개하였으나, 점차적으로 강성해진 폴리스들은 이웃 국가들과 폭넓은 교역을 시작했으며 이집트와 근동의 민족 및 문화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풍부하고 완성된 예술형식을 갖춘, 유서 깊고 개화된 그리고 뛰어난 이들의 문명의 깊은 감명을 받아 필사적으로 배움을 갈구한 끝에 글쓰는 법과 돌 깍는 법을 배움으로써 후일 그들을 유명하게 만든 문학과 조각의 창조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각각의 폴리스는 아주 독립적이였스며 그들 나름의 개성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독립된 폴리스들은 공통된 언어와 종교로 서로 연결되었다. 그리스인들은 델피(Delphi)와 올림피아(Olympia)같은 범 그리스 성소에서 서로 만나 신들을 기리는 체육, 시, 음악경연을 펼치곤 하였다. 폴리스들 중에 특히 아테네는 페르시아 전쟁 이전에도 개화되었었지만 정쟁이 종결된 후에는 그 문화가 전성기에 달했다.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뒤(B.C.479)부터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작(B.C.431)까지의 50여년 동안은 아테네에 있어서 미술, 정치, 시, 연극, 철학, 법학, 논리학, 역사, 수학 등 다방면에서 창조력이 넘쳐났던 최고의 황금시기였다. 이 때는 민주주의와 자유로운 사고를 존중한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가 통치하던 시기였다. 기원전 404년 스파르타에 패했지만 그 동안 그들이 창좋란 작품들은 뛰어난 아름다움으로 인해 이후에도 고전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리스 철학은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라는 프로타고라스의 적안에 그대로 집약되어 있다. 이것은 이성적인 회의와 현상유지에 대한 도전을 강조했던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과 결합되어 지작이고 예술적이며 창조력이 넘치는 사회분위기를 조성했다.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가 그리스 철학의 중심 개념인 것처럼, 그리스 예술의 주요 주제는 인체 조각이였다. 그리스 철학이 사고의 명석함과 조화질서를 강조했듯 그리스 미술과 건축 역시 균형을 강조하였다.
회화
그리스 인들은 뛰어난 화가였고 그들은 벽화를 그렸고 목재패널에도 그림을 그렸다.
문헌에 의하면 그리스 화가들은 사실적인 착시 기법을 정통했다고 한다. 그들이 그린 그림은 너무나 실물 같아서 새들이 벽화 속의 과일을 쪼아먹으려 했다는 기록이 있다. 불행히도 일상 생활의 도자기에 그려진 인물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도기화
도기화에는 보통 그리스 신화 속의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와 전쟁이나 잔치와 같은 현세적인 주제가 주로 그려져 있다. 가장 초기도기화의 디자인은 인물과 장식 무늬의 기하학적 형태 때문에 기하학적 양식이라 부른다. 그 후에 아르카익 시기는 도기화의 전성기였다.
도기의 용도
그리스인들은 포도주를 물로 희석시켜 마셨다. 그러므로 두 액체를 담을 수 있는 크라테르 라는 주둥이가 넓은 혼합용 사발과 그것을 우아한 컵, 카일릭스 속에 따를 수 있도록 술을 퍼 담는 오이노코에 라는 주전자가 필요하였다. 백포도주나 올리브기름, 혹은 마른 물건을 담아두는 풍부한 용량의 저장단지로는 암포라 와 하이드라를 사용했다. 레키토스는 올리브 기름을 담아 죽은 이에게 바쳐졌다. 고대의 항아리에 관한 근대적 연구가 시작된 18세기에 모든 종류의 그릇들을 꽃병 이라고 불렀다. 실용적 기능을 위해 만들어져 꽃병으로 사용된 적은 없었으나 관례적인 이 명칭은 그 이후로도 계속 사용되고 있다.
흑색상 기법의 도자기
그리스 화가들은 이야기를 보다 생생하고 실감나게 전달하는 방법에 끊임없는 관심을 기울이며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했다. 결국 그 해결책은 흑색상기법의 발명으로 나타났다. 그 기법을 창안한 예술가는 인물 그림들이 대담하고 뚜렷하게 보이도록 처음에는 그것을 실루엣으로 그렸으나 내부 표시점들을 새겨서 새김선을 따라 검은색 물감을 주입하여 윤곽선을 뚜렷하게 만들고, 장면들이 더욱 다채로워지도록 흰색과 자주색 터치들을 가했다.
추가된 흰색과 자주색은 검은 물감과 배경의 주황색보다 내구성이 적기 때문에 많은 흑색상 도기들 가운데 그 추가색들이 남아 있는 도기는 거의 없다. 이 기법은 점차 적색상 기법으로 대체되어 2세기 정에는 그 매력을 잃고 말았다.
더욱 효과적인 표현을 모색하던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은 그가 해왔던 전통적인 색채도식을 단순하게 역전시켜서 주황색, 혹은 적색 바탕에 검은색 인물들을 그리는 대신 인물들을 점토의 자연색으로 남겨 두고 배경을 검은색으로 칠하는 적색상기법을 창안해냈다.
이 기법으로 인해 색채 사이의 강한 장식적 대비 효과는 전과 다름 없지만 거친 새김도구 대신 부드러운 붓을 사용함으로써 큰 그림을 그리는데 보다 많은 여자를 부여할 수 있었다. 해부학적 묘사는 더욱 생생해졌으며, 의복의 선은 부드러워졌고 인물들은 더욱 생기에 차있다. 적생상기법은 B.C 530년경에 창안되었으며 비록 일반적인 화가들은 B.C 5세기 중엽까지도 계속 흑색상 작업을 했지만 최고의 그리고 야침에 찬 화가들은 이 기법을 채택하였다.
조각상
미술품 속에 최초로 누드를 도입한 것은 그리스 인들이었다. 그들 사회의 이상적인 인간상은 체력 증진으로 단련된 육체와 지적토론으로 연마된 정신이 조화된 인물이였다. 그리스 인간들은 인간 행동의 두 본성인 정열과 이성을 종합하고자 하였고, 인체의 미적 묘사를 통해 이 이상을 실현시키고자 했다.
그리스 조각들은 오늘날 우리가 고전 조각에서 보듯이 밋밋한 흰대리석으로된 것이 아니였다. 뜨거운 밀랍에 녹인 분말 색소의 덩어리를 머리카락, 입술, 곤톱 등에 채색하는 납화법이 사용되었다. 남성누드입상은 오래 전부터 있었지만, 여성상은 옷을 입은 여성입상에서 관능적인 누드상으로 바뀌어 갔다.
초기 조각상에 나타나는 몸에 달라붙는 옷주름은 신체 움직임의 율동과 연관되어 표현되었다. 또 다른 획기적인 변화는 신체의 무게 중심을 옮기는 원칙인 콘트라포스토의 발견인데, 이것은 몸의 무게를 한다리에 싣고 몸체는 거기에 맞는 포즈를 취하는 자세로서 마치 조각상의 인물이 움직이다가 멈춘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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