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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

투탕카멘(Tutankhamen), 이집트의 미술양식

by 왕소라과자 2017.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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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탕카멘


19세기 죽은 투탕카멘 왕은 생전에는 별로 중요한 인물이 아니였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3000년이 지난 지금, 그는 가장 널리 알려진 파라오가 되었다. 그의 무덤은 도굴되지 않은 채 발견된 유일한 왕묘이다.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는 오래 전부터 그의 왕묘가 존재하리라 믿고 6년 동안 왕의 계곡을 뒤졌는데 왕묘의 입구에서 2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을 2번이나 탐색하기도 했다. 

1922년 마침내 그의 노력은 결실을 맺어 투탕카멘 왕묘는 3000년의 먼지 속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카터가 어둠 속에서 성냥불을 그었을 때 그의 주위는 온통 황금 더미로 둘러 싸여 있었다. 


파라오의 장례 절타에 대한 지식은 모두 투탕카멘 무덤을 통해 얻어진 것이다. 

무덤속의 부장품은 과일 바구니와 빛바랜 꽃다발, 접을 수 있는 야영 침구와 장난감 상자에서부터 금으로 뒤덮힌 전차 4기에 달한다. 

사실 주요 장식 재료는 황금이였는데 황금 의자, 금으로 된 왕관, 금박 입힌 벽면, 금으로 만든 관, 그리고 3개의 포개진 관 속에서 가장 안쪽에 있던 미이라를 감싼 그 유명한 황금의 마스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금 제품이 부장되어 있었다.


무덤을 발굴하는데 관여한 20여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해 '파라오의 저주' 라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소문도 투탕카멘 왕의 무덤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전 세계의 박물관에 순회 전시한 전시회에 단일 전시로서는 역사상 최대의 관람객이 모이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이집트의 미술양식


어떤 사물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표현하고자 할 때 이집트인들에게 가장 중요시 되었던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완전함이었다. 

그림에 들어가야 할 모든 것을 가능한 한 아주 분명하게 보장해 주는 엄격한 규칙을 따르는 것과 영원히 보존하는 것이 미술가의 과업이었다. 


네바문의 정원 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나무들의 생김새와 특징은 측면에서 보아야만 명확할 것이고 연못의 형태는 위에서 볼 때 분명해지므로 그들은 나무는 측면에서 본 것처럼 연못은 위에서 내려다 본 것처럼 연못 속에 있는 물고기와 새들은 옆모습으로 그림으로써 모든 사물의 특징이 잘 나타날 수 있는 각도에서 그렸다.


혜자레의 초상을 통해서 우리는 이러한 관념이 인체의 표현에 어떻게 적용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머리는 측면에서 보여질 때 가장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에 옆모습을 그렸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의 눈을 생각할 때는 대게 정면에서 본 눈이 그려져 있다. 

어깨와 가슴은 정면에서 그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난다. 


그래야만 두 팔이 몸에 어떻게 붙어있는지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집트의 미술가들은 양쪽 발을 시각화 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엄지 발가락으로부터 위쪽으로 연결되는 발의 다는 것을 알고 엄지 발가락으로부터 위쪽으로 연결되는 발의 분명한 윤곽선을 그리기를 더 선호했다. 


그래서 두 다리는 안쪽에서 본 모습으로 그려져 이 부조에 나오는 사람은 마치 두개의 왼쪽다리를 가지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이집트 미술가들은 인간의 모습을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기보다, 인간의 형태속에 그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모든 것을 다 그려 넣게 만든 규칙을 따랐을 뿐이다. 이런 규칙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것은 원근법으로 단축되거나 잘려나간 팔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죽은 사람에게 팔요한 제물을 가져다 줄 수 있거나 받아올 수 있을까하는 주술적인 의도와 관계와 있는 것 같다.


이집트 양식은 대단히 엄격한 규칙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든 미술가는 그것을 어려서부터 배워야만 했다.  

좌상의 경우 두 손은 무릎 위에 올려야 하며 남자의 피부는 여자의 피부보다 더 검게 칠해야 한다. 


모든 이집트 신들의 모습도 엄격하게 정해져 있다. 

하늘의 신 호루스는 매나 매의 머리모양으로 그려야 하며 장례의 신인 아누비스는 자칼이나 자칼의 머리 모양으로 표현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미술가들은 상형문자의 형상과 상장을 명확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쓸 수 있도록 배웠어야만 했다. 

기존 규칙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 가장 뛰어난 미술가로 추앙되었고, 새로운 것, 독창적인 것 은 요구되지 않았다. 


그래서 3천년 이상 이집트의 미술은 거의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피라미드 시대에 가장 훌륭하고 아름답다고 생각되었던 것들은 천년이 지난 뒤에도 계속 훌륭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양식의 변화


그런데 유일하게 이집트의 양식의 철칙들을 뒤흔들어 놓은 사람은 신왕국의 '아멘호텝' 4세였다. 

그는 오랜 전통에 의해서 숭상되어 온 많은 관습들은 타파했다. 

많은 신들 중에서 그에게 있어서 유일한 신은 최고의 권위를 가진 아톤으로 그는 이 신을 숭배했고 태양의 모습으로 그리게 했다. 

그는 이 신의 이름을 본 떠서 자기 이름을 아케나톤이라 불렀고, 그의 왕궁을 다른 신들을 믿는 사제들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 현재 '텔엘아마르나' 라고 불리는 곳으로 옮겼다. 


그가 화가들에게 그리게 했던 그림들에서는 초기 파라오들의 그림에서 발견되는 엄숙하고 딱딱한 위엄은 하나도 볼 수 없고 대신 그가 태양의 신 '아톤'의 축복을 받으며 아내 '네페르티터'와 함께 그들의 자녀들을 사랑스럽게 껴안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의 초상들 중에서 그를 못생긴 사람으로 표현한 것도 있다. '아케나톤의 초상' 그것은 아마도 그가 미술가들에게 그를 인간적인 약점을 가진 사람으로 그리라고 허락했거나 아니면 그의 실제 모습을 주장했을지도 모른다. 이 아크나톤의 후계자가 투탕카멘이다.


이 중 어떤 작품들은 여전히 아톤 종교의 현대적 양식을 따는 것들이 있는데 특히 가정적인목가풍의 배경 속에 왕과 왕비를 그려 놓은 왕좌의 뒷면이 그러하다. 

의자 위에 앉아 있는 왕의 자세는 엄격한 이집트의 보수적인 미술양식에서 벗어나 왕은 힘없이 축 늘어진 채 의자에 기대고 있고 그의 부인은 그보다 작게 그려지지도 않았으며 그녀의 손을 공손히 그의 어깨 위에 올려놓고 있다. 


한편 황금의 공처럼 표현된 태양신은 아크나톤 시대처럼 또 다시 그들에게 축복을 내리듯 많은 손을 뻗치고 있다.




에게 미술


크래타 섬으로부터 소아시아와 그리스 남단을 향해 뻗어 있는 지중해의 작은 만을 에게 해 하고 한다. 


크레타 섬에서 기원전 2000년경부터 이집트인은 물론 메소포타미아인과 전혀 다른 해양 민족이 높은 문명을 발달시켰는데 그 아래 이 문명은 1000년간 존속했다. 또한 이 문명은 전설상의 크래타왕과 관련하여 미노스 문명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미노스 문명은 얼마 가지 않아 그리스 본토의 동남 해안에 도달하게 된다. 이 지방 사람들은 미노스인과 달리 기원전 1800년경 그리스로 이주해 온 초기의 그리스 부족이었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거주지가 미케네였기 때문에 그 문명을 미케네 문명이라고 부른다. 미케네 문명은 기원전 1100년경까지 융성하다가 북방에서 침략해 온 그리스 부족에 의해 흡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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