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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

미술의 기원

by 왕소라과자 2017.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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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은 2만 5천년 전, 네안데르탈인이 현대 인류의 시조인 크로마뇽인으로 진화하던 시기에 탄생했다. 인류는 지능이 발달함에 따라 창작능력도 발달하였고, 회화와 조각에서 아마자룰 만들어내는 능력도 생겨나게 되었다.

불안하게 떠돌아 다니는 수렵생활에서 농경과 목축술의 발달과 더불어 수학을 예측할 수 있는 정착 농부로서의 생활로 이어졌다. 식량 채집시대에서 생산시대로 도약한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와 소아시아 그리고 이집트에서 도시나 도시 국가 그리고 왕국과 같은 좀 더 복잡한 형태의 인간 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인간들사이의 관계와 신과 인간 사이의 관게를 규정하는 법과 종교가 만들어졌다.


문자가 발명되고 숫자와 계산법이 고안되었을 뿐만 아니라 파종과 수학에 적절한 계절과 때를 예측하기 위하여 별들의 행로가 좌표화되었다. 또한 왕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건축과 조각과 회화가 번창하였다.

수천년 동안 문명의 부침 속에서 그들은 이 미술의 세가지 형태(회화, 조각, 미술)를 통하여 그들의 문화적 야망이나 꿈, 가치체계 등을 구현해왔다.


이성의 존중과 과학적 탐구, 자연에 대한 물리학적 개념과 인간에 관한 휴머니즘적 시각들을 포함하여 특히 서양적 지성이라 불리울만한 것이 출현한 것은 그리스인에게서였다.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상업과 정치의 중심이였으며 시민계급은 사회적, 교육적, 그리고 고유의 종교적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들 몇몇 도시국가들 중에서 제한된 형태이긴하지만 민주주의가 처음으로 전개되었으며, 아테네가 대표적이다.


B.C.5세기 무렵 수차례에 걸친 페르시아의 침입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헤브리이즘과 홉합되면서 그리스는 그 내용과 정신에 있어 유럽문화로서 최초의 진정한 국제적 국면을 열게 되었다.

로마는 지성적, 예술적 문화에 있어서 그리스인들의 성취에는 결코 미치지 못했지만 고대에 있어 가장 위대한 제국을 탄생시켰다. 에트루리아(이탈리아 서북부의 고대 국가) 왕의 지배하에서 교역의 중심지로 출발한지 8백년이 지난 후에, 로마는 지금의 스코틀랜드 국경으로부터 요르단과 흑해의 먼 해안까지 수많은 민족과 나라를 위해 군림하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였다.


역동적이고 진취적인 로마의 기상은 놀랄만한 국가의 발전이 뒷받침되었다. 정치에 대한 로마인들의 재능과 이른바 로마의 평화를 통해 이루어진 서구 유럽의 로마화는 현재에도 유럽문화의 특성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모든 인류의 단일한 평화적 공동체로서의 로마적 이상은 오늘날 우리의 인식 속에 매우 크게 자리하고 있다.

인간이 직립하기 시작한 것은 수백만 년 전이지만, 미술에 눈을 뜨 게 된 것은, 기원전25,000년밖에 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간이 동굴에 살면서 사냥을 했던 마지막 빙하기에 네안데르탈 인은 도구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보다 지능이 높았던 크로마뇽 인은 진정한 의미의 창의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최초의 미술은 주거지를 꾸미거나 몸을 치장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라기 보다 예측불허인 자연의 힘을 통제하고자 하는 염원에서 출발했고, 당시 인간들은 사람과 짐승의 형상으로 만든 그림과 조각들이 초자연적이고 마술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알타미라와 라스코 동굴벽화


1879년, 마르셀리노 디 사우투올라는 그의 딸과 함께 스페인 북부의 알타미라 동굴을 탐험했다. 동굴 천정이 어른머리에서 몇 인치밖에 안되는 높이이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머리 위에 무엇이 있는지 주목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어린 딸은 동굴 천장에서 놀라운 동물 그림을 발견할 수 있었다. 디 사우투올라는 이 그림들이 선사 시대에 그려진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고고학자들은 빙하시대에 이처럼 생동감 넘치고 살아 있는 듯한 동물 그림을 인간이 그렸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믿으려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위작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알타미라 동굴 벽화가 진품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비슷한 동굴 벽화가 프랑스에서 발견되었고 알타미라 동굴 벽화에 덮혀 있던 광물질이 몇 만년 전 것으로 판명된 후 부터이다. 


오늘날 이 발견은 미술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발견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또 다른 중요한 선사 시대의 유물인 라스코 동굴 벽화 역시 우연히 발겼되었다. 지하로 통하는 동굴입구가 봉해져 있어 건조한 상태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이 동굴 벽화들은 17,000년 동안 손상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벽화들을 보기 위해 수많은 방문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수분과 이산화탄소가 지하에 유입되어 벽화 표면에 곰팡이가 발생하여 그림이 손상되었다. 1963년부터 라스코 동굴은 일반이 관람이 금지되고 있다.


B.C 15,000 ~ 10,000년경, 동굴벽화, 라스코동굴, 프랑스

동굴의 울충불퉁한 벽면에 석탄으로 이미지를 그린 것이다. 자연적인 조건을 최대한 이용하여, 바위의 불록한 면으로 양감을 표현했고 흙으로 만든 채색 안료의 명암과 색조를 이용하여 그림의 윤곽을 나타내거나 투시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또한 빨간색과 노란색 황토 조각을 분말로 만들어서 붓으로 칠하거나, 구멍이 뚫린 뼈를 사용하여 안료를 불러 그림 표면에 밀착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때로는 오래된 그림 위에 새로 겹쳐 그린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사냥할 때마다 새로운 동물 그림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거의가 동물 그림인 이 동굴 벽화들은 아무런 배경 없이 공중에 떠있는 것 같은 이차원적인 윤곽선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조각, 회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예술품은 짐승의 뼈, 상아, 돌, 사슴의 뿔로 만든 조각들이다. 그것들은 날카로운 도구로 윤곽을 새겨 넣은 저부조나 깊이 새긴 양각 부조와 3차원적인 환조도 있다.

최초의 '회화'라고 할 수 있ㄴ는 것이 기원전 15,00년 전 동굴에 그려졌다. 드물고 어두컴컴한 동굴 깇은 곳에 그려져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 그림이 사냥의 성공을 축원하는 의미에서 그려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림에는 돌이나 화살에 맞은 흔적이 있는데, 아마도 당시 동굴에 살던 인간들이 화살로 그림을 쏘아 맞추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기원전 25,000 ~ 20,000, 자연산박물관, 빈

이 작은 여성 입상은 역사상 최고의 인간상이다. 커다란 가슴과 튀어나온 배, 간략하게 표현된 둥근 머리를 보면 특정 여인상이 라기보다는 둥근 덩어리 같은 느낌이다. 이 조각상은 '풍요다산'의 상징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최초의 건축물


빙하기가 지나고 기후가 점점 따뜻해지면서, 인류의 역사는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동굴에 모여 사냥으로 살아가던 인류는 유목민이나 농경민이 되었고, 식량공급이 원할해졌다. 이 때 최초의 기념비적인 '조각품' 을 만들어내게 되었는데, 기원전5000년 전부터 나타난 거대하고 우뚜 솟은 돌로 만든 건출물이 그것이다. 이 건축물들은 대부분 세가지 기본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번째는 거대한 수직의 돌 위에 석판을 얹어 놓아 마치 거대한 탁자같은 모양을 한 '고인돌(dolmen)', 거대한 돌덩이 하나를 세워 놓은 규모가 큰 것은 약 5m 크기, 무게 350톤에 이른다. '선돌(menhir)', 스톤헨지(stonehenge) 같이 돌덩이들을 원형으로 배치한 환상열석이 있다.


스톤헨지 : 영국 최초의 속조 건축물


중세에는 이 수수께끼의 돌무리에 대해 고대 거인족이 만들었다고 했고 마술사 멀린이 마법으로 아일랜드에서 이 곳까지 날라온 것이라고 믿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스톤헨지가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위한 달력이었으리라고 추측하기고 있다. 이 거석 기념울의 맨 바깥쪽에는 TT 모양의 삼석탑(trilithons, 직립한 두 돌 위에 돌 하나를 얹은 거석 기념물의 일종)이 마치 거대한 문과 같이 버티고 있고, 그 안쪽에는 그보다 작은 규모의 비석같은 선돌들이 둥글게 늘어서 있다. 더 안쪽으로는 4.5m정도 높이의 잘 다듬어진 말편자 모양의 삼석탑이 놓여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커다란 이중의 환상형을 이루고 있으며 중앙에는 제단과 같은 돌이 놓여 있다.


프랑스 브르타뉴(Brittany) 지방의 카르냑(carnac) 이라는 곳에는 수천 개의 거석(큰 것은 3.6m가 넘는다.)들이 몇 마일에 걸쳐서 늘어서 있느데, 그 중 12개 정도는 수평으로 나란히 배열되어 있다. 그 지방 전설에 의하면 이것은 마법사가 침략해 온 로마 병사들을 모두 돌로 변하게 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마도 태양과 달을 숭배한 이 지방의 종교적 기념물 이였을 것이다.


이스터 섬의 거석상 : 그 축소법의 비밀


불도우저나 기중기 같은 기계의 도움으로 건물을 축조하는 현대인에게는 선사 시대에 기계도 없이 어떻게 이같은 거대한 돌들을 움직였는지 신비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스톤헨지의 경우 수백 명의 사람들이 50톤 이상의 돌들을 37km나 끌어와서 만든 것이다. 이들 거석 기념울 축조의 비밀은 이스터 섬의 운주민들이 그들 선조들이 사용했던 기술로 10미터가 넘는 거석상을 세워보임으로써 자세히 밝혀졌다. 


우선 돌덩이를 휴화산의 분화구로부터 잘라낸 다음 화산 아래로 끌어 내려, 땅에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 세워놓고, 새기고 다듬는 작업을 한다. 완성된 25톤에 이르는 거석상을 나무로 된 미끄럼대 위에 놓고 180명의 원주민들이 밧줄로 잡아 당기며 운반한다. 이제 남은 일은 1.8m 높이의 받침대 위에 완성된 거석상을 똑바로 세우는 일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두개의 장대와 지렛대를 사용하여 거대한 조각상을 지상에서 몇 센티미터 정도 들어올린 후 그 틈새에 돌무더기들을 채워 넣는다. 이 작업을 수십 번 반복하면 드디어 거석상을 똑바로 서게 되는 것이다. 조각상을 다듬는 데에 대략 1년이 걸리고 세우는 데에는 2주 정도 소요된다. 이 태평양 한가운데의 조그마한 섬에는 선사 시대부터 세워진 600여개가 넘는 거석상들이 조용히 섬을 지키고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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