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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30

영국의 바로크 17세기 영국은 혁명의 세기로서 찰스 1세는 국왕이었음에도 반역죄로 처형당했고 크롬웰이 교회 미술을 금지했으며 의회화들이 정권을 잡았던 시기였다. 17세기 영국 문학은 세익스피어, 밀턴에의해 전성기를 맞았지만 미술은 훨씬 그에 미치지 못했다. 청교도 교회에서 종교 미술은 금지되어 있었고 신화를 소재로 한 그림은 영국인들의 취향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 미술은 거의 초상화에 국한되어 있었다. 과거 영국의 우수한 초상화가 홀바인과 판다이크의 예에서 보듯이 거의가 외국인들이었다. 그러나 17세기에는 최초로 영국 출신의 3명의 중요한 화가가 배출되었는데 호가드, 게인스버러, 레이놀즈가 그들이다. 윌리엄 호가드(William Hogarth)나는 그림의 주제를 극작가처럼 다루려고 노력한다. 나의 회화는 나의 무대.. 2017. 3. 7.
네덜란드 바로크 네덜란드는 플랑드르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지만 두 나라는 정치, 문화적으로 매우 달랐다. 플랑드르가 구교가 지배하는 왕국이라면 네덜란드는 신교가 지배적인 독립된 민주국가였다. 따라서 네덜란드에서는 종교화가 금지되어 었었고 성당, 왕실, 귀족 계급과 같은 미술의 중요한 후원자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미술의 주제와 소유권이 민주화되었던 것이다. 미술가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미술 판매 시장을 통해 작품을 거래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다행히 부유해진 네덜란드의 중산계층은 미술품 수집에 열성적이었다. 1640년에 암스테르담에 온 한 방문객은 미술품의 질과 사람들의 심미안이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높았다. 모든 사람들이 값비싼 미술품으로 자신의 집을 치장하는 데 열심이였다. 고 전한다. 미술품의 수요는 .. 2017. 3. 6.
플랑드르 바로크 루벤스오늘날의 벨기에와 남부 네덜란드에 해당하는 플랑드르는 종교 개혁 이후에도 카톨릭 국가로 남아있어서 예술가들이 종교화를 제작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플랑드르 바로크는 단 한사람, 루벤스의 독무대 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 대사는 루벤스를 가르켜 화가들의 왕자이며 왕자들의 화가 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그는 매우 화려한 일생을 살았는데 전 유럽의 궁전에 파견되어 화가이자 외교관으로 활약했다. 그는 일개 지방 화가하기보다는 플랑드르뿐 아니라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영국의 군주들을 위해 봉사한 전 유럽의 궁정 화가였다. 결과적으로 그의 작품에는 남부와 북부의 스타일과 사고가 완벽하게 융화되어 있다. 창조력 넘치는 천재에게서는 보기 드물게 루벤스는 국제적인 명성과 개인적인 행복을.. 2017. 3. 5.
이탈리아 바로크(베르니니, 보르미니) 베르니니베르니니는 바로크 시대의 가장 위다한 조각가이자 건축가, 화가, 극작가, 작곡가, 무대디자이너로서도 활약했다. 번쩍이는 위트와 유머감각을 지녔던 그는 대리석 조각이 잘 되지 않을 때는 코메디와 오페라의 각본을 쓰기도 했다. 로마의 분수, 종교예술, 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실내 디자인으로 베르니니는 로마의 어떤 예술가보다도 위대한 족적을 남겼다. 조각가의 아들로 테어난 베르니니는 25살에 그의 기념비적인 작품 다윗상을 조각했다. 힘을 표출하지 않고 있는 미켈란젤로의 다윗 상과는 달리 베르니니니는 막 돌을 집어 던지려고 몸을 비틀고 있는 장면을 선택했다. 긴장감으로 입을 꼭 다물고 있는 베르니니의 다윗은 막 움직이려는 동작으로 힘에 넘쳐있어서 조각상 앞에 있는 어떤 관객도 순간적으로 그의 돌팔매를 피해.. 2017. 3.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