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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

플랑드르 바로크

by 왕소라과자 2017.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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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스

오늘날의 벨기에와 남부 네덜란드에 해당하는 플랑드르는 종교 개혁 이후에도 카톨릭 국가로 남아있어서 예술가들이 종교화를 제작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플랑드르 바로크는 단 한사람, 루벤스의 독무대 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 대사는 루벤스를 가르켜 화가들의 왕자이며 왕자들의 화가 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그는 매우 화려한 일생을 살았는데 전 유럽의 궁전에 파견되어 화가이자 외교관으로 활약했다. 그는 일개 지방 화가하기보다는 플랑드르뿐 아니라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영국의 군주들을 위해 봉사한 전 유럽의 궁정 화가였다. 결과적으로 그의 작품에는 남부와 북부의 스타일과 사고가 완벽하게 융화되어 있다.


창조력 넘치는 천재에게서는 보기 드물게 루벤스는 국제적인 명성과 개인적인 행복을 함께 누렸다. 그는 교양있고 핸섬했으며 성격도 진취적이어서 여행을 즐겼다. 그는 6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했고 지칠줄 모르는 정력을 지니고 있었다. 루벤스의 화싷을 방문했던 한 손님은 그가 그림을 그리면서 라틴어로 오비디우스의 시를 낭송하는 것을 감상하고 가끔씩 대화를 하며 편지를 받아쓰게 하는 등 이 모든 일을 동시에 해치우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술화하고 있다. 한 후원자는 루벤스는 너무도 많은 재능을 지니고 있어서 그림 그리는 재주쯤은 가장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 고 말할 정도였다.


루벤스의 삶과 예술에는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가 넘치고 있었다. 2,000여 점이넘는 작품을 남긴 그의 작품 생산력은 피카소에나 견줄 수 있을 정도였고, 끊임없이 주문이 쏟아져 들어와 부와 명성을 안겨다 주었다. 그 때문에 그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저녁까지 쉬지 않고 일했고 밀려드는 주물을 감당하기 위해 한 부대의 조수들이 그를 도왔다. 루벤스의 화실은 공장에 비교할 수 있었는데 루벤스가 그의 구상을 스케치로 대강 그려놓으면 제자들이 채색하고 그가 마무리를 하는 식이였다. 안트베르펜에 루벤스의 화실에는 그가 일하는 동안 손님들이 그 광경을 지켜볼 수 있도록 그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발코니가 아직도 남아 있다. 어떤 손님은 화상하기를 루벤스의 붓이 빈 공간 위를 한 번 스쳐가면 화면 전체가  순식간에 그림으로 뒤덮혔다고 말하고 있다.


종교화

루벤스는 이탈리아에서 어느 정도 명성을 얻은 후 안트벤르펜으로 돌아와 궁정화가로 있으면서, 수 많은 교회용 천장화가 대규모 제단화들을 주문받게 된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십자가를 세움은 십자ㅏ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군인들이 밧줄로 땅에서 끌어올려 공중에 세우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고통이 가득하지만 신과 영적으로 교류하고 있는 듯한 예수의 얼굴이 대각선 구성과 연극적인 조명의 정점을 위치한다. 이와 같은 강렬한 움직임과 빛의 효과에서 틴토레토와 카라바조 등의 영향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바로크적인 곡선과 역동감 있는 명암법으로 육체의 다이나믹한 에너지를 루벤스만큼 잘 표현한 화가는 없을 것이다.


누드화

루벤스의 그림 가운데에 가장 유명한 것은 육감적이고 관능적인 뚱뚱한 여자의 누드화일 것이다. 그는 두 여인과 향복한 결혼생활을 즐겼는데 첫번쨰 부인이 죽자 16살의 소녀와 재혼했다. 둘 다 풍만하며 금발에 윤기나는 피부를 지닌, 그의 이상적인 여성상이어서 루벤스는 그의 부인들을 즐겨 그렸다. 미술사가 케네스 클락의 누드의 변천사 라는 책을 보면 피부의 표현이 화가들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였다고 한다. 루벤스는 피부 표현에 매우 능란해서 아름다운 누드가 많다 는 점을 판매의 주안점으로 삼을 정도였다. 주제가 무엇이든 간에 그는 동적이며, 둥굴고 육중한 인체 구성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대부분의 화가들이 고전에 경도되어 석고상이나 고전 조각을 그리고 있을 때 루벤스는 살아 있는 모델들을 즐겨 스케치하였다고 한다.


마리 드 메디치 시리즈

루벤스의 가장 야심적인 대작은 프랑스의 여왕 마리 드 메디치의 생애를 기념하는 연작화이다. 그녀는 왕실의 재정을 마구 탕진하고 남편인 왕과 매우 사이가 안좋았던 어리석은 여자 였는데 남편이 상해당한 후 잠시 프랑스의 왕위를 계승했던 군주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루벤스에게 루브르 궁의 2개의 방에 자신의 혁혁한 업적을 영원불멸하게 기록할 연작화를 그리도록 주문했던 것이다. 루벤스는 어떤 엄청난 규모의 주문이더라도 내 재능으로 소화해낼 자신이 있다. 고 장담한 대로 21개의 마리 드 메디치 시리즈를 3년만에 조수도 쓰지 않고 완성해냈다. 이 시리즈를 그리는 데 가장 큰 어려움 이렇다할 업적이 없는 그녀의 생애를 어떻게 영광스럽게 윤색해 내느냐하는 문제였다. 바로 그 부분에서 루벤스의 재능이 빛을 발했다. 그는 마리 드 메디치가 아들을 낳는 장면을 장엄한 탄생화로 바뀌고 있다. 마리의 교육 장면에서는 미네르바와 아폴로 신이 직접 음악과 웅변술을 가르치고 있다.


마리 드 메디치의 마르세이유의 입성 에서는 명예의 여신이 황금 나팔을 불며 그녀의 프랑스 입성을 환영하고 있다.그는 일부러 마리의 이중 턱을 그려넣지 않았는데 대신 보는 이의 시선이 전면에 있는 풍만한 육체의 관능적인 바디 요정들에게로 가도록 하고 있다. 이 그림에서 루벤스는 풍부한 색채, 호화스러운 의상, 금으로 만든 배와 같은 바로크 시대의 과장된 표현을 보여주고 있다. 루벤스의 생애와 작품은 모두 활력에 넘치는 것이었다.주제가 무엇이든 간에 루벤스는 금방 그림 전체를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감싸버린다. 그것은 오래 사는 것보다 즐겁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는 루벤스 자신의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판 다이크

어린시절부터 신동으로 이름이 높았던 안토니 판 다이크 경 은 불과 16살의 나이에 한 사람의 화가로서 독립했다. 그 전에 몇해 동안 루벤스의 화실에서 일했지만 제2인자의 자리를 견디지 못한 그는 이탈리아로 갔다가 다시 영국에 정착하여 찰스 1세 궁전의 왕실 화가가 되었다. 핸섬하고 자만심이 강하며 놀라운 재능을 지녔던 그는 전형적인 멋쟁이였으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지는 화가로 유혐해졌다. 그는 상류 사회의 사치스런 분위기에 탐닉하여 옆구리에 항상 칼을 차고 값비싼 의상을 입은 채 자신의 상징으로서 해바라기를 달고 다녔다고 한다. 판 다이크는 뛰어난 초상화가로서 이후 100년 동안 영향을 미칠 귀족적이면서도 개인의 특성이 잘 드러나 있고 심리적 통창력이 담긴 초상화 양식을 정착시켰다.


판 다이크는 차갑고 공식적인 왕실 초상화를 보다 인간적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이 새로운 양식의 초상화에서 그는 귀족과 왕족들을 그들의 신분을 암시하는 듯한 고전적인 기둥이나 반짝이는 커튼과 같은 배경속에서 포즈를 취하게 했다. 그러나 인물들은 포즈를 취했다기보다 잠깐 멈춰 선 듯한 느낌을 주도록 여유있게 구성하여 이런 과장된 배경 속에서도 인간미를 느끼게 하고 있다. 판 다이크의 초상화가 인기를 끌었던 또 다른 이유는 사실적이면서도 모든 대상들이 완벽하게 보이도록 미화시키는 그의 재능 때문이었다. 키 작고 평범한 찰스 1세가 판 다이크의 손에서는 전쟁터의 용사같이 당당하게 언덕위의  나무 밑에서 휴식을 취하는 근사한 기사와 같은 왕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작품 속에서 판 다이크가 사용한 유일한 속임수는 머리와 비율을 1:6으로 하는 대신 1:7로 바꾸어 왕을 날씬하고 키가 커 보이도록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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