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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

네덜란드 바로크

by 왕소라과자 2017.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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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는 플랑드르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지만 두 나라는 정치, 문화적으로 매우 달랐다. 플랑드르가 구교가 지배하는 왕국이라면 네덜란드는 신교가 지배적인 독립된 민주국가였다. 따라서 네덜란드에서는 종교화가 금지되어 었었고 성당, 왕실, 귀족 계급과 같은 미술의 중요한 후원자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미술의 주제와 소유권이 민주화되었던 것이다. 미술가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미술 판매 시장을 통해 작품을 거래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다행히 부유해진 네덜란드의 중산계층은 미술품 수집에 열성적이었다. 1640년에 암스테르담에 온 한 방문객은 미술품의 질과 사람들의 심미안이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높았다. 모든 사람들이 값비싼 미술품으로 자신의 집을 치장하는 데 열심이였다. 고 전한다. 미술품의 수요는 끊임 없었다. 심지어 고깃간 주인이나 빵장수, 땜장이들조차 미술품을 가게에 걸어놓았다.


이러한 열성적인 미술품 수집열 덕분에 수많은 화가들과 높은 수준의 미술품이 쏟아져 나왔는데 화가들의 계층과 정물화, 해양화, 실내화, 동물화와 같이 각자의 특기로 세분화되어 있었다. 17세기 네덜란드에는 정물화 한 분야에만 500명이 넘는 화가들이 있었다고 한다. 네덜란드의 바로크 예술은 1610 ~ 1670년 사이에 개화됬다. 그 양식은 사실적이고 주제는 일상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화가들이 단순한 기술자 이상이었던 이유는 투박하거나 반짝이는 각기 다른 질감의 표면에 빛이 흡수되거나 반사하는 작용을 그려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는 데에 있다. 대부분의 네덜란드 화가들은 보수적이어서 자신의 특기 분야를 되풀이해서 그려내는데 만족하였지만 할스, 램브란트, 페르메어 같은 3명의 거장들을 능란한 기교를 넘어서 독창적인 경지에 들어선 화가이다.


정물화(Still Life)

회화의 한 장르로서 정무화는 종교 개혁 이후 네덜란드에서 발달했다. 비록 다른 나라에서는 열등한 회화형태로 무시당했지만,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뛰어난 사실주의적 기법의 정물화가 전성기를 맞이했다. 때떄로 정물화에 해골이나 연기를 날리는 양초같이 인생의 덧없음을 의미하는 사물을 그려넣기도 했다.


18세기 프랑스에서는 샤르댕(Chardin)이 보잘것 없는 사물을 사실적인 기법으로 그림으로써 정물화라는 장르를 남부 유럽에 전파시켰다. 19세기 화가인 코로, 쿠르베, 마네는 사물의 미적인 면을 관찰하기 위해 정물화를 통해 사물의 구조와 색채를 실험했으며 이탈리아 화가, 모라디는 오로지 정물화만 그렸다. 미국에서 포토 리얼리즘 양식은 페일 형제의 착시 기법의 정물화를 통해 알려졌고 뒤를 이어 하네트와 페토의 마치 실제 사물과 같은 착각화로 이어졌으며 현대 화가 오드리 블랙에게로 이어지고 있다.


풍경화(Landscape)

바로크 시대 이전에 풍경은 그림 전면의 대상뒤에 그려지는 배경에 불과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화가들은 풍경을 그자체로 독립된 장르로 다루기 시작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화가들은 풍경을 그자체로 독립된 장르로 다루기 시작했다. 푸생과 클로드 로랭에 의해 이상화된 풍경화가 발달했던 프랑스와는 달리 알베르트 쿠입이나 야콥판 루이스댈, 마인데르트 호베마같은 네덜란드 풍경화가들은 광대한 하늘 위에 떠다니는 구름을 즐겨 그렸으며 자연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데 치중했다.


프란스 할스(Frans hals's)

프란스 할스는 순간의 표현을 잡아 내는 그의 재능으로 인해 미술계에 널리 알려졌던 인물이다. 악사나 집사를 그리든, 건실한 중산층 시민을 그리든 간에, 그가 그린 인물들은 모두 웃거나 기분좋게 술에 취해 있어 생기가 넘친다. 할스의 유명한 조상인 웃고있는 기사 를 보면 입술은 미소짓고 있고 눈을 반짝이며 콧수염이 멋들어지게 위로 솟아 있다. 할스는 이와 같이 인물의 허세부리는 느낌을 경쾌한 화필을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 하고 있다. 할스 이전의 네덜란드 화가들은 회화의 사실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해 붓자국이 거의 보이지 않도록 그림을 그리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러나 할스는 스케치와 같이 휙휙 휘두르는 경쾌한 화필을 자신의 특징으로 삼고 있다.


할스의 알 라 프라마 기법(이탈리아어로 단숨에 그린다는 의미이다.)은 캔버스 위에 바탕칠을 하지 않고 곧바로 그림을 그려나가는 기법이다. 따라서 회화는 단 한 번의 붓질만으로 완성이 된다. 할스의 화필은 가까이서 보면 붓자국만이 보이지만 약간 거리를 두고 보면 루벤스나 벨라스케즈의 작품들처럼 그럴 듯한 형태를 이루고 있어 즉흥적인 순간을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의 작품 즐거운 토퍼 를 보면 순간의 생생함이 너무나도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그림속 인물의 입술은 막 말을 하려 하고 있다.


할스는 또한 딱딱한 그룹 초상화의 표현법을 바꿔놓았다. 그의 성 조지 근위대의 사관들 을 보면 군인들을 전사로 묘사하기보다는 축제에 참가하여 흥겹게 노는 사람들로 묘사하고 있다. 할스 이전의 화가들은 그룹 초상화를 그릴 때 균형감을 주기 위해 사람들을 줄지어 서있도록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할스는 그들을 탁자 주위에 편안한 자세로 앉게 함으로써 각각의 얼굴에 개성이 드러나게 하면서 자연스럽게 상호작용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러한 장면은 매우 즉흥적인 느낌을 주지만 포즈와 제스처로서 균형을 맞추고 있다. 깃발의 바로크적인 사선 구성과 어깨띠, 목주위의 주름진 칼라 장식이 사관들의 뻐기는 듯한 분위기를 잘 살려주고 있다.


1620~30년대 할스의 활달하고 즐거운 초상화들은 대상의 영원 불멸성보다는 순간의 활기에 찬 모습을 묘사하는 그의 재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불행히도 그는 말년에 유행에 뒤떨어진 화가로 취급되어 어려운 노후를 보내야 했다. 그는 초상화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주벽때문에 큰 돈을  모으지는 못했다. 할스는 말년에 바가지 긁는 마누라와 10명의 자녀들에게 둘러싸여 매일 밤 술독에 빠져 빈곤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고 동시대인은 기록하고 있다.


렘브란트 판 린(Rembrandt van Rijn)

서구 미술사상 가장 유명한 화가는 아마도 렘브란트 판 린일 것이다. 생전에 렘브란트는 유명한 초상화가였다. 오늘날 그의 명성은 무엇보다 말년의 깊이 있는 감정을 보여주는 통찰력있는 작품들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다. 


작품세계

초기 20년 동안 렘브란트는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날렸고 그에게는 주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수많은 작품을 생산해 냈지만 이런 상황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는 회화는 화가가 완성되었다고 느껴야만 완성된 것이다. 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고객들은 그들의 초상화가 시기에 맞추어 완성되기를 원하기 마련이어서 그러한 고객들과 갈등을 겪곤 하였다. 헴브란트는 또한 성경과 역사 속의 이야기를 바로크 양식으로 그린 작품을 남기긱도 했다. 이 작품 속의 인물들은 멜로 드라마 같은 감정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매우 극적인 느낌을 준다.


야간순찰대가 그려진 1642년 렘브란트의 생애에 전환점을 이룬 해이다. 그의 사랑하는 아내가 죽었고, 렘브란트는 점차 바로크 양식의 손쉬운 초상화 작업을 버리고 보다 깊이있고 조용한 스타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성숙기의 그의 작품은 보다 덜 육체적인 대신 심리적인 통찰력이 넘쳐났다. 그의 더욱 성경 속의 주제를 파고 들었는데 그것을보다 억제된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색채는 붉은색과 갈색이 주를 이루었고 고독한 인물들의 쓸쓸한 분위기가 스며드는 듯한 주제를 다루었다. 렘브란트는 명암의 단계적 변화를 통해 분위기와 성격, 감정을 전달함으로써 명암 대조법 사용에 있어서 최고봉을 이루고 있다. 또한 렘브란트는 역사상 에칭 판화를 가장 잘 다룬 화가였다. 그의 바늘 다루는 솜씨는 매우 빠르고 솜씨 있어 스케치화의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의 가장 잘 알려인 에칭으로 된 풍경화 6번째 다리 는 저녁 식사 도중 하인이 이웃에 겨자를 빌리러 간 사이에 그려진 작품이다.


야간 순찰대(The Nightwatch)

렘브란트 초기 회화의 대표작 야간 순찰대는 빛과 구도, 기술의 절정을 보여주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 작품으로서 명성을 얻고 있다. 이 작품은 그 위에 덮혀 있는 어두운 유약 때문에 야간 순찰대로 잘못 알려졌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유약 제거작업 이후, 중앙에 있는 실제보다 약간 큰 덩치의 대장이 부대원들에게 행진 명령을 내리는 순간을 담은 대낮의 장면임이 밝혀졌다. 


할스와 마찬가지로 렘브란트는 진부하고 딱딱한 그룹 초상화를 개혁하여 바로크적인 빛, 움직임, 포즈를 통해 흥분된 감정을 전달하며, 인물들끼리의 상호교환적인 행동을 통해 흥분된 감정을 전달하며, 인물들끼리의 상호교환적인 행동을 통해 생생한 감정을 전달해주고 있다. 강렬한 광선과 어두운 배경과의 대조는 보는 이의 시선을 그림 주위 이곳저곳을 떠돌게 하여 대장을 부관은 관객의 공간 속으로 걸어 나오려 하고 있다. 창, 방패, 총, 깃발, 드럼이 만들어 내는 서로 교차하는 사선은 일견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서로 알맞은 각도에 걸쳐 있어 모든 것을 통합하는 기하학적 구조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다. 부관의 제복과 소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의 노란색과 총사들의 제복과 허리띠의 붉은색도 전체적으로 그림을 통합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 부대원들 전부가 그룹 초상화를 위해 똑같이 비용을 부담하였으나 렘브란트가 어떤 인물은 어두운 배경 속에서 희미하게 처리했는가 하면 서로 겹쳐서 안보이는 사람도 있어 불만을 사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제자가 쓴 편지에 의하면 램브란트가 주문받은 개개인의 초상화보다는 창조력이 요구하는  바에 굴복해 버렸다 며 야간순찰대에 대해서 너무도 동적이고 힘에 넘처 있어 다른 그림들은 마치 식은죽 먹기처럼 쉽게 보인다 고 쓰고 있다.


자화상

약 40여 년의 세월 동안 렘브란트가 남긴 100여 점의 자화상은 판 고흐 이전까지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예술적인 탐구이다. 그의 자화상은 촉촉한 눈매의 젊은 시절부터 듥어가는 자신을 엄숙하게 지켜보고 있는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그려진 것이다. 중간에는 모피와 금으로 감싼 부유하고 성공한 장년기의 초상화가 있고 후기의 초상화는 명암의 대조가 보다 덜 직접적인 대신 내면의 세계를 표현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다음의 초기와 후기 초상화를 비교해 보자. 23살 떄 그려진 그의 첫 자화상을 보면 얼굴의 한 면이 그림자 속에 파묻혀 카라바조적 명암법을 사용하고 있다.이 자화상에서는 성격 묘사보다는 철제 칼라위의 리벳과 같은 옷 장식 세부 묘사에 보다 치중하고 있다. 그러나 54살에 그려진 후기 초상화를 보면 회화 제작 기법이 보다 자유로와 졌고 대담한 화필로 내면 세계의 묘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회화기법

자잘한 세부묘사에서 거대한 스케일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렘브란트 회화의 테크닉은 대담하고 두꺼운 물감 사용법을 특징으로하고 있다. 처음으로 그의 생애를 책으로 쓴 전기 작가는 지난 몇년 동안 렘브란트는 작품을 매우 빨리 제작하는 경향이 있는데 가까이서 보면 벽돌공이 삽으로 범벅을 해 놓은 것 같아 보인다. 고 쓰고 있다. 그의 기법은 거의 물감으로부조를 뜨는 것 같아서 붓으로 물감을 두껍게 칠한 후 밝은 부분은 팔레트 나이프를 사용하여 손가락 절반 굵기의 두꺼우 물감을 임파스토 기법으로 발라나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을 작품을 제작하면 표면이 울퉁불퉁하여 빛을 분산시켜 반짝거리는데, 대신에 어두운 부분은 엷게 유약을 칠해 빛을 흡수하도록 하고 있다. 렘브란트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말한 것은 단 한 번 뿐이었다. 나는 그림을 마음 속 깊숙히 자리한 가장 크고 깊은 감정으로 그린다. 고 편지에 쓴 것이다.


요하네스 페르메어(Johannes Vermeer)

그의 생애가 수수깨끼로 남아있기 때문에 델프트의 스핑크스 라고 불리우는 화가 요하네스 페르미어는 근래들어 렘브란트 다음으로 유명한 네덜란드 화가가 되었다. 그는 델프트에서 테어나 43살에 파산의 충격으로 미망인과 11명의 자녀를 남기고 사망할 때까지 그것에서 살았다. 그가 남긴 작품은 35~40여 점에 불과하며, 그보다 많은 작품을 제작한 것 같지는 않다. 앵그르 이전까지 이렇게 꼼꼼하게 작품을 제작한 화가가 없었다. 그리고 판 아이크를 제외하면 페르메어처럼 빛의 사용법에 능란한 화가도 없었을 것이다. 다른 화가들이 회색, 녹색, 갈색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비해 페르메어의 색채는 보다 순수하고 밝아서 그 이전까지 어떤 화가에게서도 볼 수 없는 강렬함을 주고 있다. 이러한 색채와 빛의 사용법에도 불구하고 페르메어는 직사각형의 완벽한게 균형잡힌 구도를 통해 침착하고 안정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의 그림들은 왼쪽에 있는 창문을 통해 빛이 들어오고 있는 꺠끗하고 검소한 방에서 인물들이 집안일에 몰두해 있는 광경을 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범한 주제를 가치있게 만드는 요소는 시각적 사실성을 부여하는 그의 관찰력에 있다. 색채는 우리 눈이 항상 보아왔던 그대로 묘사되어 있으며 부드러운 빛은 은은한 광채로 방안을 감싸고 있다. 그의 작품은 어떤 잉화나 동적인 사건을 담고 있지 않다. 다만 여러 사물의 표면 위를 맴도는 거의 만질 수 있을 것 같이 부드럽고 은은한 빛이 그림의 진짜 주제이다.


페르메어는 자신의 소묘에 정확성을 시하기 위해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 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작은 구멍이 뚫려있는 검은 상자인데 반대편에 있는 사물의 영상을 투사하여 종이위에 흔적을 남기는 장치이다. 그러나 페르메어는 단순히 투사된 영상을 베끼는데 그치지 않았다. 그의 물감 사용법도 또한 매우 혁신적인 것이어서, 보통 세부묘사에 치중한 부드러운 화필을 사용하지만 떄떄로 그림의 표면 위에 도드라지도록 점을 찍어 거칠고 진동하는 듯한 3차원적인 질감의 느낌과 함께 빛의 반사율을 돕도록 하였다. 이런 기법은 인상파의 점묘법과 흡사한 것이다. 어떤 비평가는 그의 그림 표면을 진주 가루들이 녹아 엉킨 것 같다 고 묘사 하기도 했다.


부엌에서 일하는 하녀 를 보면 그의 선이 아니라 구슬과 같은 빛의 알갱이로 사물의 윤곽선을 그려냈음을 알 수 있는데, 특히 우유단지 가장자리의 모자이크 같은 물감자국을 보면 확연하다. 페르메어는 또한 사물이 빛과 얼마나 가까운가를 통해 색상의 강약을 조절하는데 능숙했다. 이 그림에서는 투박한 모양의 빵덩어리가 가장 강렬한 빛을 받고 있으며 물감을 두껍게 칠한 임파스토(impasto) 기법으로 그려져 있다. 페르메어의 세부묘사에 대한 관심은 무채색으로 회질한 벽면의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얼룩이나, 구멍, 못까지도 묘사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구도는 균형이 매우 잘 잡히고 조화롭게 융화되어 있어 그 중의 어느 한가지라도 옮기면 전체의 안정감이 무너질 듯 하다. 자기 일에 몰두해 있는 하녀의 모습이 존엄한 분위기마저 느끼게 해준다. 한 비평가는 일찍이 어떤 네덜란드 화가도 페르메어 만큼 여성을 극찬한 적이 없다. 고 말한 바 있다.


작업실의 화가

그림에 나타나는 의미층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역사의 여신 클리오가 화가의 모델이 되고 있다. 테이블 위에 널려있는  회화에 관한 논문과 조각상 데드 마스크, 스케치북, 분리 독립되기 전 17개의 지방으로 구성되었던 네덜란드 지도 등의 사물들이 그림 해석에 실마리를 제공한다. 화가의 영감을 고무하고 있는 역사의 여신은 역사책을 들고 옛 네덜란드 회화의 명예를 증명하는 듯하다.


부엌에서 일하는 하녀

페르메어의 그림은 인물을 대상으로한 정물화 같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단순한 정경의 조용한 아름다움을 새삼 발견하게 하여 준다. 그의 회화의 진짜 주제는 빛과, 그것이 사물의 형태와 질감, 그리고 색채에 미치는 영향이다. 이 그림에서도 창문으로 쏟아지는 빛이 각 사물의 색감을 고조시키며 형용할 수 없는 감흥을 불러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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