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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

이집트 미술

by 왕소라과자 2017.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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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미술


영혼불멸에 대한 이집트인의 집착을 보면 이집트 미술이 3,000년동안 변함없이 지속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것도 없다. 사실이 놀라운 것도 없다. 

그들의 맹목적인 관심사는 살아있는 신으로 간주되었던 그들 지배자의 사후 안락한 삶의 보장하는 것이었다. 거대한 이집트의 건축물과 예술품들은 파라오의 영혼의 영원한 영광을 위해 존재하였다. 


이집트 인들은 그 밖에도 문학, 의학, 고등 수학을 발달시켜 인류문명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다른 지역에서 크고 작은 문명들을 흥망을 거듭하는 동안에도 이집트에서는 나일강의 정기적인 범람에 힘입어 3000년 동안을 통일된 왕조 아래서, 정체되어 있기는 했지만 세계 역사상 최초의 장대한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우리는 고대 이집트에 대한 대부분의 지식들을 무덤에서 출품된 유물을 통해 얻게 되었다. 영혼 불멸을 믿는 이집트 인들은 지상에서의 행복을 죽은 후에도 누릴 수 있도록 무덤에 온갖 사치품들을 함꼐 묻었다. 


따라서 무덤의 벽면에 그려진 벽화와 상형 문자들도 죽은 자의 생전의 일상 생활을 세세히 묘사하는데 지중하고 있다. 그리고 미이라로 만든 육신이 부패했을 경우 영혼이 대신 머무를 곳으로 초상 조각을 만들었다.


초상화와 조각상의 인체는 엄격한 공식에 따라 묘사 되었다. 

눈과 어깨는 정면을 향하고 있고, 머리와 팔, 다리들은 측면으로 그려졌다. 


또한 벽화의 표면은 수평의 선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마르고 어깨가 넓으며 엉덩이가 작은 인물들이 머리 장식을 하고 치마 모양의 옷을 입은 채 한쪽 다리를 내밀고 있다. 인물의 크기는 신분에 따라 달라지는데 파라오는 거인처럼 묘사되어 있는 반면, 시종들은 난장이같이 그리고 있다. 


초상화 조각들은 영원 불멸을 위해 만들었기 때문에 그 재료를 화강암이나 섬록암과 같은 단단한 소재로 하였다. 입상이거나 좌상이거나 이 초상 조각들은 부서질만한 돌출 부위를 최소한으로 하여 만들었다. 자세는 언제나 정면이고 좌우대칭적이며 팔을 몸통에 근접하여 조각하였다. 


그리고 가능하면 해부학적으로 정확하도록 만들었다. 



미이라 예술


이집트 인들은 카, 즉 생명의 힘은 영원하다고 믿었다. 따랏거 죽은 자의 영혼이 계속 머물를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 시체를 방부 처리하는 기술이 극도로 발전 하였다. 


육체 보관은 금속 꼬챙이로 죽은 자의 뇌를 콧구멍을 통해 뽑아내는 것에서 시작한다. 간, 허파, 위장, 간장과 같은 내장은 몸에서 꺼내어 별도로 마련한 항아리에 담는다. 이제 남은 것은 시체를 소금물에 1달 정도 절인 후 꺼내어 완전히 건조시키는 것이다. 


완전히 마른 육신은 속을 채우게 되는데 여자의 가슴은 솜뭉치로 채운다. 시체의 겉을 완전히 붕대로 감싼 뒤 마지막으로 관 속에 안치한다. 이처럼 정교한 화학적 처리 못지 않게 이집트의 건조한 기후와 세균이 없는 모래도, 미이라의 보존에 기여하는 요소이다.


1881년에는 왕들의 미이라 40여구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는 말라붙은 피부, 치아, 머리카락이 아직도 존재하는 람세스 2세의 미이라도 있었다. 


그의 궁정에서 모세가 성장했을 3000년 전의 이군주는 말 그대로 대왕이라 불리웠는데, 67년 간의 재위 기간 동안 100명도 넘는 자녀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미이라를 카이로까지 나른 화물 운송업자가 붙인 분류표에는 '건어물' 이라 표시되어 있었다.



이집트 학이란 무엇인가?


고고학의 한 분야인 이집트 학은 거대한 골동품 시장에서 이집트 문양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형성되었다. 이집트 학은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략했던 1799년에 시작되었다. 


나폴레옹은 38,000명의 군대와 함께 175명의 학자를 대등했는데 그 중에는 언어학자, 골동품 감정가, 예술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초기의 고고학자들은 이 원정을 통해 막대한 양의 유물들을 프랑스로 들어올 수 있었는데, 그 중에는 그리스 어와 이집트 상형문자를 포함한 3개 국어로 쓰여진 검은 현무암 석판인 로제타 스톤도 끼어 있었다.


15세기 동안이나 이집트의 상형 문자는 해독 불능의 상태로 있었으나 로제타 스톤이 발견된 지 22년 후 프랑스의 언어학자 장 프랑수아 상폴리옹이 마침내 해독에 성공했다. 


그의 업적으로 사람들이 고대 이집트에 대해 열광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초기의 이집트 학자들은 종종 무덤과 사원을 발굴하여 발견되 유물을 유럽의 수집가들에게 팔아 넘기곤 하였다. 다행이, 오늘날에는 과학적인 조사를 바탕으로 정밀한 발굴이 행해져 이와 같은 손실은 막을 수 있게 되었다. 


소유자의 일상 생활을 담은 타임 캡슐인 이 무덤들은 사라져 버린 문명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다.



피라미드의 건설 과정


체옵과 기자에 있는 80여개의 피라미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석조 건축물의 하나이다. 고대 이집트의 인들은 먼저 13메이커에 달하는 땅을 완벽한 정사각형으로 다듬는 것에서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남동쪽을 북서쪽보다 약 1cm 만큼만 높도록 했다. 


피라미드 내부는 석회암과 같은 단단한 재질로 만들었기 때문에 자그마한 층으로 쌓여 버팀목을 끼운 반면, 왕의 방 천장은 6개의 화강암 석판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천장 위의 벽돌의 육중한 무게를 지탱하고 외압을 줄이고자 별도의 칸막이를 위쪽에 설치했다. 


기원전 2600년 전에 세워진 이 피라미드는 지금까지도 아무런 문제 없이 지탱하고 있다. 건축 당시에는 돌의 짜임새가 극도로 정밀하여 돌과 돌 사이에 칼끝이 들어가지 못했다. 피라미드 건설에 소요된 자재와 인원들은 다음과 같다.



건축자제


2,300,000개의 석회암 벽돌,  석회암 벽돌 1개의 무게는 2.5톤 초보적인 석재 절단 도구들, 나일강 동쪽의 채석장에서 서쪽의 방둑까지 벽돌을 나를 거룻배 통나무 굴림대, 벽돌로 만든 경사면, 석재를 건축 장소까지 끌 나무 운반대 14.4m 높이의 피라미드 표면을 덮을 하얀 석회암



노동력


4,000명의 인원이 15톤 이상의 벽돌을 가축, 바퀴, 기계나 용구의 도움 없이 인력으로만 날랐다.



완공일

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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