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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

초기 기독교 미술

by 왕소라과자 2017.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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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내세의 구원에만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지상의 물체를 사실적으로 재현하려는 경향은 자연히 사라지게 되었다. 누드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고, 심지어 옷을 입고 있는 육체도 해부학적인 정확성이 무시되곤했다. 육체와 정신 사이의 조화로운 균형을 추구하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이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신 중세이 미술가들은 영혼의 표현에 치중했는데, 특히 새 신자들에게 교회의 교리를 전다하는데 전력을 다했기 때문에 이 시기 미술은 종교의 시녀가 되었다.


신학자들은  신자들이 물지의 아름다움을 통해 신성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고 믿었고, 그 결과로 매혹적인 모자이크와 회화, 조각품이 만들어 졌다고 한다. 건축에서 신성에 대한 지향은 보다 발고 가벼운 건물의 형태로 나타났다. 육중하고 거대한 로마 건축은 서서히 사라지고, 이상적인 기독교인 상이 건축에 반영되시 시작하였다. 이들은 밖에서 보면 소박하지만 내부는 성령을 상상하는 모자이크, 프레스코, 스테인드 글라스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중세미술은 세 가지 양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비잔틴, 로마네스크, 고딕 양식이 그것이다.


초기 기독교 미술

초기 기독교 시대는 1세기의 초기 기리스도교인 공동체 시대로부터 그리스도교 박해시대까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도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승인한 서기 325년부터 서로마 지역이 야만족 왕국들의 지배하에 있던 서기 500년까지로 편의상 두 시기로 나누고 있다. 초기 기독교는 합법적이지 않는 종파였기 때문에 온갖 박해와 기독교는 합법적이지 않는 종파였기 때문에 온갖 박해와 수모를 겼었으며 박해가 심할수록 그들은 로마의 지하묘소 카타콤(catacomb)에 숨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했다. 카타콤의 벽과 천장에는 초대 기독교인이 남긴 많은 벽화가 남아있었다. 국교로 승인된 후에는 미술에 있어서도 혁신적인 계기를 맞게 되어 고도의 기능을 갖춘 건축가들에 의해 여러 곳에 거대한 성당이나 수도원이 세워지고 교회벽면과 천장을 장식하기 위한 회화나 특히 새로운 예술 방식, 불에 구운 색유리를 재료로 쓴 초기 벽면 모자이크가 전문가에 의해 만들어졌다.


카타콤의 미술

죽은 사람은 매장한 지하묘소인 카타콤의 천장과 벽에 그려진 초기 기독교도들의 그림으로부터 그들의 일차적 관심은 현세보다 구세주와 함께하는 내세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와 로마시대에 미술에서 중시했던 인간의 이상과 육체미, 힘참과 아름다움의 조화보다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구원, 참뜻과 행적 등을 표현하는 데 더 큰 의미를 두었다.


산피에트로와 마르첼리노, 카타콤의 천장화

중앙은 99마리의 양떼를 두고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고 있는 착한 양치기, 즉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다. 두 손을 들고 위를 보고 이는 인물은 구원을 간구하는 신자들을 상징한다. 왼쪽과 오른쪽은 구약성서 요나설화의 중요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아래 장면은 박농쿨 그늘에 누워 있는 요나가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의 장면들은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인간을 구원하여, 영원 불멸의 삶으로 인도한다는 신의 약속을 의마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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