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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

비잔틴, 로마네스크, 고딕

by 왕소라과자 2017.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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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천년왕국

서기 325년, 기독교는 저물어가는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되었다. 이는 곧 그 유산을 계승한 새로운 민족, 즉 로마인들이 야만인이라 칭했던 타민족들의 신앙이 되었다. 기독교화된 로마제국의 동방의 잔재인 비잔티움이 번창하는 동안 서로마제국은 붕괴되었으며, 붕괴된 서로마 제국의 주들이 서로 흩어져 프랑크, 서고트, 부르군트, 앵글로-색슨, 룸바르디아등의 호전적인 야만왕국으로 흡수되었다. 이후에 이어지는 400년경부터 1400년경에 이르는 천년간의 시대를 역사가들은 중세 또는 암흑시대라고 불러왔다.


고대와 근대 사이의 기간 즉 중세는 삶은 공허하고 끔찍한 암흑의 시대이며 단순히 두 문명의 중간에 낀 공백 기간일 뿐, 이라고 수세기동안 간주되었다. 그러나 중ㅅ의 미술이 거칠고 원시적이라는 역사학자들의 오랜 생각은 18세기 후반 이래로 바뀌기 시작했으며 이제 우리는 이 시대를 그들의 혁신성과 위대함을 인식하면서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고있다. 중세 문명은 기독교와 그레코로만의 영향을 받은 로마의 전통이 그리스와 로마인들이 야만인이라고 불렀던 켈트게르만 족의 새롭고 활기탄 정신과의 충돌과 조화의 상호관계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서구문명은 13세기까지 과거의 그리스 로마 시대와 비잔티움, 그리고 이슬람 세계의 영향들에 의해 끊임없이 자극받았으며, 그러면서도 줄곧 새로운 형ㅌ의 문화로 재생시켜 위대하고 독창적인 문명으로 진화해 갔다.


또한 이 시기는 고대의 어떤 것보다 훨씬 진보된 기술의 발전을 이룩했으며,환경의 제약을 뛰어넘어 인간의 힘을 더욱 확대시켜 주었던 도구와 기계장치의 발명과 발달을 통해 교회가 노예제도를 비판하고 노동과 기술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자유로운 장인 계급은 이제 더 이상 노예가 아니었으며, 중세에 있어서 생산의 대리인이었고, 길드의 조직을 통해 중세 도시경제의 확고한 토대를 구축했다. 


자유 시민들이 거주하여 번창하던 도시는 상업과 공업의 발달에 자극제가 되었으며 새로운 도시들이 건설되어 번창했다. 오늘날 번창하는 대부분의 유럽 도시들이 12세기 무렵에 선설되었거나 새로이 복구되었다. 실제로 근대의 모체가 되었던 피렌체는 일찍이 그 부의 기반을 쌓았으며, 15세기에는 유럽을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대담하고 창조적인 문화의 시대로 인도할 정신과 재력을 이미 풍분히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중세의 시작

중세는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 약 1000년 동안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의 초기인 비잔틴의 황제 유스티나누스가 사망한 565년부터 샤를르 마뉴가 통치한 800년 사이를 암흑 시대라 일컫기도 하는데 3000년간에 걸쳐 이룩된 문화를 야만족들이 파괴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암흑 시대란 중세의 층징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 콘스탄티노플의 휘황찬란한 비잔틴궁전에서 장대한 고딕 대성당들까지 중세의 미술과 건축에는 빛나는 업적이 많이 있다. 특히 중세에는 서구 문화가 세가지 면에서 크게 변화 하였다.


첫째, 문화적 주도권이 지중해 연안에서 프랑스, 독일, 영국 등의 북유럽으로 옮겨 갔다.


둘째, 기독교가 이교도와 야만족을 제압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셋째. 사람들의 관심사가 현세에서 내세로 옮겨 갔으며, 육체를 미의 대상에서 타랑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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