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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

중세초기 미술

by 왕소라과자 2017.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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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트족의 미술

비잔틴 제국 즉 동로마 제국이 찬란한 기독교의문화를 창조하고 있는 동안에 이탈리아를 중으로한 서로마 제국은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5세기에서 7세기에 걸쳐 연이어 서유럽의 로마에 침략한 게르만 민족은 서로마 제국을 점령하여 독립된 지방 왕국을 형성하고 200년간의 소위 혼란과 암흑의 시대를 열었다.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전쟁, 봉기와 살인, 약탈, 방화로 점철된 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혼란의 세계에 빠져서 암흑상태로부터 탈출한 만한 ㅈ헤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고대세계의 몰락 이후 유럽의 제국들이 대략 형태를 갖추고 생겨나기 이전의 혼란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시대에 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이 시기를 암흑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 전 유럽을 기습해서 약탈을 일삼던 고트족, 반달족, 켈트족, 바이킹족, 게르만족 들을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적 업적을 귀중한 것으로 여겨온 사람들은 야만인이라 부르고 있으나 그들은 정교한 금속세공이나 탁월한 목공예 기술과 같은 그들 나름의 고유한 미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용들이 몸을 꼬고 있거나 새들이 신비스럽게 얽혀 있는 것같은 복잡한 문양을 좋아했다. 특히 스키타이 인들로부터 전부받은 동물문양을 게르만 민족들은 동물이나 사람의 형체를 거의 알아볼 수 없는 기하학적 문양으로 발전시켰다.


린디스판 복음서

환상으로 서로 뒤엉켜 있는 용과 뱀들로 이루어진 믿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풍부한 레이스 문양으로 된 십자가인데 그 바탕은 십자가보다 한층 더 복잡하게 되어 있다. 움츠러든뱀들의 율동적인 형상은 끊임없는 변화를 가져와 가운데 있는 와인 글라스들이 연결된 것 같은 켈트족의 십자가와는 대조를 이룬다. 각기 다양한 문양이 서로에게 엄격하게 대응하며 디자인과 색채의 복잡한 조화는 감탄을 자아낸다. 고유의 토착적인 전통을 몸에 익힌 켈트족 미술가들의 솜씨와 예술적 감각이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카롤링거 왕조의 미술 751~987년경

게르만 민족들의 대이동과 정착이라는 대혼란기에 샤를마뉴가 세운 프랑크 왕국은 프랑스,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의 일부에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통일된 기독교 왕국을 건설하고 로마의 옛 영광을 되찾아 흠모해 왔던 콘스탄틴 처럼 되기를 원했던 샤를마뉴 왕은 서기 800년의 크리스마스 날 로마 교황 레오 3세로부터 황제의 칭호를 받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추대되었다. 자신을 시저의 후예로 생각했던 그는 학문과 예술에 대한 열렬한 찬미자였으며 그의 제국이 영광스런 예 로마처럼 되기를 원했던 그는 수도 아헨의 궁정으로 서유럽이나 동쪽 비잔틴 지역의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과 공예가들을 초청하였다. 샤를마뉴 황제로 인해 유럽은 비로서 암흑시대에서 벗어나 문화가 다 시 부흥되기 시작한 것이다. 카롤링거 왕조의 르네상스 미술은 지중해 문화와 켈트, 게르만 정신의 융화에 주안점을 두고 있었으며 진정한 의미에서 유럽적이라 부를 수 있는 최초의 예술이 여기에서 태어난 것이다.


오토왕조의 예술 1001~1031년

샤를마뉴 황제가 죽은 후 843년경 프랑크 왕국은 동프랑크와 서프랑크, 중프랑크로 나누어졌고 동프랑크와 서프랑크는 후에 독일과 프랑스로 발전해갔다. 동프랑크 왕국의 오토 1세는 제국의 기반을 다지고 교황으로부터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추대되었다. 오토 1세는 키롤링거 시대의 문화와 전통을 보전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더욱 발전시켰으며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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